사랑이여, 내게 와줘

아사기리 코하쿠/AU

✨파라로스 AU - 하기오테스✨ Part. 1

2021. 10. 31. comment

 

새로운 생명에 한없는 축복을.
네 안에서 커다란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세계는 빛으로 가득 찬 것이 되겠지.

 

천사님을 만났어요.

어린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래, 천사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해 주셨니? 하는 물음에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다고 배시시 웃는 아이를 보며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가벼운 꿈이겠거니 생각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노래를 부르고 누구도 읊어주지 않은 구절을 읽어내다 결국은 밝은 금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뜨는 순간까지.

 

신권이 황권과 별개로 고유한 힘을 가지던 시대에 고위 성직자란 가문의 명예이기도 했으므로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 새하얀 신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변 없이 바르게 자라난 아이는 대제사장의 지위에 올라 수호하는 천사와 신의 뜻 아래 그 말을 전하게 되었다.

 

가브리엘의 말을 듣는 자는 많았다. 부드러운 빛의 머리칼에 빛나는 후광을 두르고 인간들의 세계에 발을 디딘 가브리엘은 신의 뜻을 전한 후 금세 그곳을 떠났다. 이곳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있고, 개중 일부에게 전해지는 신의 말이 있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도 한가득 남을 만한 전령의 사랑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거대한 존재와 그가 알리고자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어서 그는 그를 위해 안배된 대제사장 앞에 자주 내려앉고는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를 보고 미소짓던 드물게 천계와 가까운 자에게.

 

"하기오테스."

"가브리엘 님."

 

그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제사장이 머무는 기도실, 그녀가 늘 소중히 지니고 다니는 십자가 앞에 날개를 접기만 하면 되었다.

 

신의 전언을 내리고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가브리엘은 일상처럼 오늘 만난 사랑스런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처럼 그것을 들으며 맞장구도 쳐 주고, 신의 뜻을 전했으나 통하지 않은 자들 탓에 슬퍼하는 그를 달래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그녀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가브리엘이 황급히 천계로 돌아가고 나서야 하기오테스는 고개를 수그렸다.

 

그가 모든 인간을 헌신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날카롭게도 와 닿는다. 대천사 가브리엘의 사랑은 끝도 없이 퍼준다 한들 또 그만큼 남아 있는 것이고, 유일한 상대는 분명 신과 그의 동료 천사들 뿐일 것이다. 지금 이리 제가 없으면 안 될 듯 굴어도 분명 자신은 그저 잠시 곁을 스치는 무수히 많았을 대제사장 중 하나에 불과할 터다.

 

천사의 사랑을 받는 게 나 하나뿐일 줄 알았니, 어리석은 하기오테스.

 

경외에서 비롯되었을 감정이 누구도 모르게 그 형태를 바꾸고는 심장에 칼을 겨누었을 때부터 그녀는 점점 그 자신의 피에 잠겨 가고 있었다.

 

보잘것없고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이기 때문에 쉽게도 덧없는 꿈을 꾸는 것이겠지. 이제 와서는 이 마음조차 혼란스러웠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인간이었어도 나는 이런 마음을 가졌을까?

 

신앙의 사랑을 인간적인 것으로 착각해선 안 돼. 순백의 날개를 영영 접고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면 안 돼.

 

힘주어 움켜쥔 십자가 탓에 손이 아팠다. 사실은 그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과한 신성력을 담아 온 몸이 빠르게 제 역할을 끝내려 하는 것만 같았다.

 

아직은 끝낼 수 없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날까지 이 몸을 억지로라도 버티게 하고 싶었다. 추억 속의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 마음이 죄가 될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멈출 수 있었을까?

 

 

한 점의 어둠.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단 한 조각의 어둠일 뿐이었는데.

 

“가브리엘…”

 

미카엘의 부름에 가브리엘은 꾹 힘주어 움켜쥔 손을 살짝 폈다. 손톱자욱이 남은 손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숨을 삭였다.

 

“어디로 간 거야.”

 

하기오테스. 그의 이번 대 대제사장.

생이 그리 길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늘 과한 신성에 시달려 오래 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대의 대제사장은 인간을 초월할 정도의 신성을 지녀 그 육체에 조금이나마 영향이 덜 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고도 없이 급작스레 무너지는 몸에 놀란 것은 그뿐이었다. 하기오테스는 마치 미리 예견한 사람처럼, 고통에 떨리는 몸으로도 덤덤하게…

 

“가브리엘.”

 

기어코 상처난 손바닥을 라파엘이 보듬었다. 부드럽고 강인한 손길에 손을 빼지도 못하고 그대로 있다가는 후, 한숨을 내쉰다.

 

그녀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대제사장의 영혼이 그 천사에게 오르지 못한 것이. 그 마지막을 천사가 함께했음에도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것이.

 

그들은 대신전에서 진행되는 하기오테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가고 비어버린 육체는 눈을 감은 채로 아름다운 꽃장식에 둘러싸인 채, 관에 누워 고요하게 잠든 모양새였다.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참석자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들여다본다.

품에 안긴 흰 튤립 다발이 가만 불어온 바람에 살며시 흔들렸다. 그녀의 향도 모습도 모두 여기 있는데…

 

‘가브리엘 님.’

‘새로운 생명에 한없는 축복을…’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천계에서 그와 함께했어야 할 그의 대제사장.

무언가를 하다가도 마주하면 가만 휘어지는 황금빛 눈동자가 눈에 선했다. 그녀가 바치는 음악도, 경의와 존경이라기보다는 다정에 조금 더 가까운 나긋한 목소리도.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록사나가 다가와 흰 튤립 하나를 하기오테스에게 전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사들을 본다. 젖은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가브리엘은 그와 닮은 하기오테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잃어버린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분은, 답해 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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